진부하지만 벌써 12월 12일이라니

오전 11시 비행기로 출근 시간에 공항엘 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전 6시에 일어났다. 떠나는 날이구나. 그동안의 추억을 곱씹을 시간도 없이 캐리어 두 개를 완벽히 챙겨놓고 한인택시에 전화를 걸었다. 오전 7시에 떠날 생각이었는데 너무 일찍 가는 것 같다며 오전 8시에 데리어 온단다. 콜을 지 맘대로 정하네? 어쨌든 일찍 일어났는데도 J의 남자친구는 파이널 시험이라 나보다 더 일찍 나가는 바람에 서로 비몽사몽 어색한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B도 학원 시간에 맞춰 일찍 나가는 바람에 깔끔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주방에 있는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발라서 한입 넣자마자 택시가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J가 집 앞까지 캐리어를 끌어다 줬다. 한국 가서 보자는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탔다. 예전에 뉴욕 왔다갔다 할 때 봤던 그 택시기사는 아니었다. 큰 캐리어 두 개를 들고 가니깐 한국에 몇 년 살다가 들어가는 줄 알았단다. 저도 이렇게 짐이 불어날 줄 몰랐어요. 



이 택시기사 아저씨는 친지들이 모두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서 8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보니 미국에선 자신이 노력한 만큼 얻어가는 게 분명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미국은 여성에 대한 법이 잘 되어있어서 결혼 세 번이나 하고 다 이혼했는데도 한 달에 꼬박꼬박 몇백만 원씩 양육비가 나와 애 셋을 대학에 보낸, 게다가 지금은 돈 펑펑 써가며 여행 다니는 기구한 삶(?)을 사는 한인 여성 이야기도 해줬다. 저는 뭐 어쩌고저쩌고 해도 한국이 좋아요.



출근길이었는데도 생각보다 빨리 공항에 도착했다. 터미널 B 앞에 내려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보딩패스를 받았다. 출국심사를 받고 게이트 앞에서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글을 썼다. LAX 공항은 와이파이가 빵빵해서 아주 좋다. 게이트 앞에 점점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오전 10시 반 넘어서 비행기에 올라탔다. 바로 직전에 한국에 있는 가족이랑 친구들에게 출발한다고 연락해두고 J에게도 연락을 해뒀다. 










비행기를 많이 타본 건 아니지만 무조건 복도 자리가 갑인 것 같다. 처음엔 창가 자리를 선호했는데 너무 답답함. 무조건 복도쪽! 이번엔 D 열에 앉아서 왔다. 이상한 사람은 없었는데 내 바로 앞에 일본 여성 두 명, 바로 뒤엔 어느 나라 사람인진 모르겠는데 진짜 목소리 졸라 높고 따따따따다닫 거리는 여자들이 있었고 그 뒤엔 중국인들 와 진짜 그리고 저-기 앞쪽엔 13시간 내내 울어대는 갓난아기 때문에 여러모로 지옥의 비행이었다. 자리마저 안 좋았으면 기절했을 수도 있겠음. 



기내식은 데리야끼 치킨에 밥 있는 거 한번 먹고 생선구이에 감자 있는 거 한번 먹었다. 중간에 수시로 음료가 나오고 브라우니나 초콜릿, 땅콩 같은 게 있었다. 난 이번엔 한 번도 거절 안 하고 다 받아먹은 듯. 아 그리고 잠은 두어 시간밖에 안자고 나머지는 계-속 영화 봤다. 미국 갈 때 제대로 못 본 레드2부터 엘리시움, 퍼시픽림, 잡스 보고 막판에 화이트 하우스 다운 보다가 한국 도착해버리는 바람에 40분 남겨놓고 영화를 끊어야 했다.







현지시각으로 LA에서 12일 오전 11시 출발, 한국 13일 오후 5시 도착

영하 4도라는 말에 오싹했다. 그래도 생각보단 안 춥네? 하면서 캐리어를 찾고 세관 신고를 했다. 난 진짜 양심에 찔려서 세관신고 400불에서 200불 초과한 총 600불을 구매했다고 적었는데 세관 신고하러 갔더니 거기 아줌마가 X-ray 찍어보고 나를 부르더니 그냥 가라고 했다. H언니의 말이 맞았다. 나를 정말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뭐 산 것도 없는 게 세관 신고하러 왔냐? 이런 표정이었음. 그래도 양심 있게 하고 나가니깐 개운하더라.







수원 가는 공항버스를 예매하고 버스 한 대를 보낸 뒤 다음 버스를 탔다. 졸다 보니 밤 7시 30분 즈음에 정류장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운 좋게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한국 택시기사 아저씨도 어디 이민 갔다 오느냐고 물었다. 아닌디유. 한 달 여행인데유! 미국 서부랑 동부 다녀왔다고 했더니 아저씨도 택시기사 하기 전 대기업 다닐 때 출장으로 유럽 쪽 정말 많이 다녀왔다며 95년도 유럽여행에 관해 얘기해줬다. 흥미로웠다.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했고,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니 집 앞에 도착했다. 엄마한테 카톡 보냈더니 나와서 큰딸- 하고 부른다. 집이구나 집, 최고!




금요일 밤이었는데 아빠도 늦게 퇴근, 동생도 밤 11시에 퇴근이라서 엄마랑 나랑 둘이서 그 큰 캐리어 두 개를 낑낑대며 들고 올라갔다.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며 걱정하셨다. 몸무게를 재봤는데 3킬로 빠졌더라. 원래 여행 다녀오면 살쪄서 오는 거 아님? 어쩐지 겨울 바지가 크다 싶더니만. 살이 빠진 채로 돌아왔으니 딸내미가 얼마나 걱정될까. 그래서 집 가자마자 밥부터 먹었다. 미역국에다가 하얀 쌀밥을 말아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음! 생굴을 잔뜩 넣은 겉절이도 먹고 오이와 양파와 부추를 송송 썰어 넣어 양념한 것도 먹고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크림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근데 갑자기 뭘 많이 먹어서 속이 안 좋았다.



가족들 선물을 꺼내놓고 퇴근한 동생에게 보여주고 아빠도 보여드리고 정말 금세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너무 졸렸지만 우선 비행기에서 못다 본 영화의 뒷부분이 궁금해 영화를 보고 나서 블로그에 사진들을 올리고 글을 정리했다. 한 달간의 여행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벌써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고 월요일엔 치과를 가야 하고 수요일에도 약속이 생기고 송년회 시즌이라 카톡이 계속 울린다. 이제 맘 편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일해야지. 미국에 있을 땐 한국 가는 날이 마감처럼 느껴졌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목적 없는 멍한 인간이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