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사진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004 김남훈 멜로드라마 파이터

김온더테이블 2012. 9. 24. 23:34



멜로드라마 파이터

저자
김남훈 지음
출판사
텍스트 | 2009-07-0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를 펴내며지금 이곳에 과연 희망은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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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33

아무리 커다란 목표라고 해도 그 목표를 잘게 나누면 작은 일이 된다. 마치 '천 발자국에 돌 하나'처럼. 그 잘게 쪼갠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면서 성취감을 느낀다면 시베리아같이 엄혹한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커다란 일을 잘게 나누고, 그 나눈 일들을 하나씩 끝내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 그것은 내가 아주 우연히 그리고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얻게 된 방법이다. 


p.067

아쉽게도 나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 방법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자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20대 중반에야 깨달은 것이다. 그것도 공부와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오토바이로 말이다. 내가 이런 학습의 왕도를 조금 더 일찍 알았떠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p.117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는 듯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야기했다. 잠깐이지만 나도 정말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공상허언(空想虛言)이라고, 자신이 한 거짓말을 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증세가 있다는데, 내가 그때만큼은 정말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


p.126

소비되는 시간과 체력은 정말 살인적이다. 이 일이 너무 버거워 그만두고 싶을 순간도 가끔 있지만 그때뿐이다. 내 또래 남자들의 삶에 견주면 정말 행복하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 들이는 노력을 따져 보면 대가가 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월초에 찍히는 통장 잔고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중략)

그리고 이처럼 목표로 삼은 바와 현실의 방향이 일치해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나 때문에 격투기를 보고 나 때문에 선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들을 만날 때면 보람도 느낀다. 그들은 내게 말한다. 너무 재미있다고, 눈을 못 떼겠다고, 해설자와 내가 '간'이 맞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겠다며 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한다. 


p.132

보증금 없는 지하 사무실이 첫 사무실이었다. 페인트 냄새가 가시질 않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내 사업이라는 생각에 버틸 만 했다. 처음으로 명함이 나온 날, 우리 네 사람은 명함을 모두 모아 벽에 붙혔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써놓았다.

' 한 사람이 두 사람 일을 하고 세 사람 몫을 벌자! '


p.134

'당신들과 거래해서 나만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도 벌게 될 것이다' 라는 기본 전제를 항상 잊지 않았다.


p.135

난 끊임없이 업체들을 돌았다. 그때까지도 받아주지 않는 업체가 있으면 난 특별히 비 오는 날에 찾아갔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사람들이 밖에 잘 나가지 않기 때문에 미팅 약속을 잡기 쉬웠고, 비까지 맞으며 찾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야박하게 하지는 못하는게 인지상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계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계속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다 보면, 행여 나중에라도 우리 회사와 다른 회사를 놓고 저울질할 때 우리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p.182

입석은 오늘도 괴로워. 괴로울 뿐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한 퇴근 길이어야 하는데 늦게 탔다는 이유만으로 서서 가야 하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다리에 힘을 주고 모르는 이와 살을 부대끼는 게 너무나 괴로워. 더 웃긴 것은 앉아 있는 사람과 자리를 다툰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거야. 이미 누군가는 앉아 있고 누군가는 서 있는 상태에서 자리 경쟁이란 건 없어. 오직 앉아 있던 사람이 스스로 자리를 내주지 않는 이상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거야. 입석, 즉 가난한 사람끼리 계속 부딪히며 나아갈 뿐이지.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려운 사람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야. 한 움큼뿐인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지.

  입석은 그저 빨리 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지만, 앉아서 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여유가 있다보니 버스 노선에서부터 시작해 운전기사의 운전 태도, 복장 등을 평하가지. 그러고는 버스 안에 비치된 엽서를 통해서 버스 회사에 압력을 넣지. 

  그러다 보니 버스 회사와 운전기사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더 치중하게 되지. 제일 힘든 건 서서 가는 사람들인데 말야. 서서 가는 사람들은 '좀 안으로 들어가요. 거기 서 있지 말고'라는 타박이나 듣게 되는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한 가지 선택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야말로 인생에서 제일 치졸한 선택이야. 아마 너는 인생에서 입석일 거야. 지금의 20대라는 시절은 네가 앉아서 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를 주고 있어. 나이 들면 앉아 가려고 한두장 정거장 걸어서 거슬러 올라가는것도 힘들어 못해. 지금 서서 가면 죽을 때까지 서서 가게 될 확률이 커.


p.192

그렇다. 나는 악역 레슬러다. 정정당당해야 할 링에서 쇠사슬과 의자로 상대방을 내려치며 유혈을 즐기는 희대의 악당. 하지만 그 악역도 누군가에겐 선역이다.



p.216

찌들어 살아서도 그렇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맘에 드는 책 한권을 못 읽고, 맘에 드는 공연 한 번 못보고 지냈는데, 사회 나와서 뜬금없이 '너 이제는 이런 거 봐라' 하면 그게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정말 불쌍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