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공간

건축가 홍윤주의 생활 건축 탐사 프로젝트

홍윤주


p. 15 한 번에 계획해서 만들어질 수 없는 어떤 것, 건축가가 통제한 조형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이 그때그때 필요해서 직접 덧붙인 공간과 장치들이었다.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되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공간. 건축가가 지은 작품으로서의 건축은 태어난 형태 그대로 죽지만, 얘네들은 죽기 전까지 꿈틀거리고 살아 움직인다. 참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인정하게 됐다. '난 이런 취향의 사람이구나.'

p. 45 되게 이상한 게 놀러 가서 호텔에서 자면 그냥 그렇거든요. 그런데 자기 동네, 집 옆에 있는 호텔에서 자면서 자기 동네를 보면 마치 여행 온 기분이 들어요.

p. 52 이사 가서 내가 처음 하는 행동은 낯설고 휑한 벽에 좋아하는 엽서나 사진들을 붙이는 것이다. 새로 산 물건보다는 아끼던 물건을 눈에 띄게 배치함으로써 '내 공간'이라는 영역 표시를 시작한다. 낯선 공간에서 안정감을 찾기 위한 본능이리라.

p. 207 처음 '경작 본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그게 어찌 본능인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건 정말 본능이구나 싶다. 해 드는 곳에 틈만 있으면 어김없이 텃밭 상자나 화분이 자리를 잡고 있고, 빈 자투리땅에는 뭐라도 심어 키운다. 이웃집 옥상은 화분들이 꽉 들어차서 밭을 방불케 하고, 어떤 집은 담벼락에 화분을 일렬로 쫙 올려놔서 도대체 물 주고 가꾸는 일을 어떻게 할까 궁금증을 유발한다. 

p. 221 진한 커피 주위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어둑한 장면이 연신 나오는 짐 자머시 감독의 <커피와 담배>(2003)는 제목 그대로 커피와 담배를 예찬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말하듯, 역시 커피엔 담배다. 그리고 술에도!

p. 285 포르셰, 재규어, 랜드로버, BMW... 고급 자동차 매장들이 늘어져 있는 거리라 해도 경비실은 다 똑같다. 이런 동네는 경비실도 다를 것 같은 막연한 이미지가 있지만, 화려한 건물을 지을 때도 경비실 같은 건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이면의 공간이다. 호화롭고 깨끗한 동네일수록 이런 대비가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미래의 양극화된 풍경을 그린 영화 속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아무리 먼지 하나 없는 최첨단 공간이라 해도 사람 손은 필요하고, 누군가의 손은 때가 묻어야 한다.

p. 312 울퉁불퉁한 곳일수록 점유하기 좋다. 새로운 것이 생겨도 눈에 확 들어오지 않고, 조용한 뭔가 만들기에 적소이다. 더군다나 최소의 노력으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p. 339 철거는 필요하지만, 무허가와 허가를 기준으로 철거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방법이다. 생활사라는 작은 역사도 신중하게 다뤄주면 좋겠다.

p. 372 "囍: 쌍희 희. 혼인이나 경사가 있을 때, 그 기쁨을 나타냄.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 喜(희)에서 한 획을 떼어낸 자를 두 개 나란히 하여 만든 문양 글자로, 기쁨이 겹침을 뜻함. 실제의 문장에는 쓰이지 않고, 소목 공예, 그릇, 천, 베갯머리 등에 쓰임." 

- 자세한 이미지는 여기에서 확인. 실제로 저런 한자를 많이 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라는 것과 실제 문장에서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아마 뚝딱뚝딱 기쁨의 마음으로 도끼다시를 작업하던 인부나, 주인들이 급조하여 만든 한자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p. 389 가끔 길을 가다가 눈길을 끄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이없는 구조물을 발견할 때가 있다. 딱히 어떤 말을 갖다 붙여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을 일본에서는 '토마손'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제일 교포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 외국에서 데려온 용병 야구 선수 토마손(토머슨)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그는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었다는 조금은 슬픈 일화가 있는데, 엄연히 존재하지만 무용지물인 것을 희화해 토마손이라 부른 것이다.

- 그 다음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일본에는 '초예술 토마손'이라 불리는 개념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창작 의도가 존재하지 않는 무용의 것을 예술의 각도에서 탐색하는 하나의 예술 행위라고 한다. 책이 나와있다길래 보고싶단 생각이 간절했다. 무용지물이지만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정의에 부합하는 것. 토마손... 재미있다 정말.



p. 427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짧은 점심시간에도 사방팔방이 다 막힌 지하 공간 안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건 참으로 갑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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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땡스북스에서 읽다가 놓고 내려놨던 책을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허물어진 벽, 알록달록한 계단, 이상하게 쌓여있는 화분더미, 공사장 비닐 사진을 찍어대는 나에게 저걸 도대체 왜 찍냐고 물었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냥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저것들에 눈이 가고 저것들이 저런 '상태'가 되기까지가 너무 궁금하다고 말했었던.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책은 더운 여름 에어컨을 켜지 않은 버스 안에서 누군가가 열어재낀 창문같이 느껴졌다. 꽉 막혀있는 뇌의 어느 부분에 바람이 뿅 하고 뚫린듯 개운함 또는 답답함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퇴근길, 왠지 모르게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계신 곳을 한참 둘러보고 나왔던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임진아


p. 32 작업실을 망원동으로 구한 '과거의 나' 떄문에 한강을 건너며 출퇴근을 하는 '오늘의 나'를 떠올려보자. '오늘의 나'는 매일 똑같은 강을 건너도 사실 매일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매일 강을 건넌다고? 정말 특이하다!" 하고 외칠 만한 일상인지도 모르는데. (중략) 다른 날에 다른 마음으로 샀을 스트라이프 티셔츠들을 한데 모아 아예 한 칸을 스트라이프 전용 칸으로 만들어놓으니 오히려 듬성듬성해 보인다.

- 나도 수원에서 잠실, 왕복 3시간 넘는, 무려 금정과 사당역이라는 두 번의 환승 헬게이트를 지나, 출퇴근을 했던 시절. 새벽같이 일어나 좀비 상태로 출근했다. 하지만 잠실역에 내려 3번 출구로 나오는 순간 나는 다시 감각이란걸 느낄 수 있는 인간으로 돌아왔다. 잠실에서 근무지까지는 반드시 석촌호수를 지나야했는데, 잘 닦여진 인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작은 내리막길과 계단을 통해 석촌호수를 낀 산책로를 걸어 출근했다. 아침 8시의 석촌호수는 깨끗했고, 신선했고, 맑았다. 그리고 아 내가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다니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땐 석촌호수 요정이 나를 출퇴근하게 만든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고? 근데 생각해보니 퇴근할땐 석촌호수를 안 끼고 최대한 지름길로 갔던 기억이 난다. 퇴근길엔 뒤도 안 돌아보고 잠실역까지 걸어갔었던 호호

p. 41 어쩌면 엄청 고심해서 쓰레기를 만드는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 퇴사를 결정했다.

p. 45 회사 책상에 앉아 모니터 속의 확대될 만큼 확대된 것들만 보며 사느라 시선이 점점 좁아졌다고 느꼈는데, 카페에서의 시간은 공기 같았다. 

- 나도 지금 사업하기 전 회사를 2년 8개월 동안 다닌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시야는 좁아질대로 좁아졌고, 거기에 반감을 가지다가 결국 다 놓아버린채 다녔었던 기억. 

p. 47 개인의 고집 자기만의 고집이 있는 사람이 좋다.

- 꼭지 전체가 다 좋다. 자기만의 고집은 동거 하는 사람이 있을때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결혼 전엔 각자의 역할이 분담돼있어 '고집'이랄 게 없었다. 설거지의 마무리는 엄마가, 각자의 옷 정리는 각자가 마지막으로 했기 때문. 하지만 결혼 후 설거지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 음식도 여건이 되는 사람이, 빨래도 그렇다. 그렇기에 '고집'의 결과가 바뀐다. 그 고집에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투닥거리며 다투고, 타협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나는... 거의 8:2 수준으로 오빠에게 모든걸 배운다. 오빠가 상위에 있음이 분명하다. 호호

p.52 "그냥 지각한 사람보다 케이크와 함께 지각한 사람이 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늦었지만 사 왔어!"

p. 106 우리는 너무나 쉽게 관심 없는 질문을 하며 살고 있다. 우연히 지인과 마주친 어색함에 눈에 보이는 말들만 잡아 내뱉기도 한다. 살 빠지셨네요? 밥은 드셨어요? 전보다 얼굴이 좋아보이시는데요? 어디 가세요? 

p. 114 어쨌든 누군가를 욕하면서 친해진 관계는 결국 서로를 욕하며 이별하게 되어 있다.

p. 139 "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잖아. 좋겠다." 라는 말을 또 들어버린 것이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말들 때문에 정적은 쉽게 찾아왔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큰 달에 자꾸만 눈이 갔다. '자주 만나지 않은 데는 역시 이유가 있었나...'

- 중학교때 친했다가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던 친구는 내게 항상 그랬다. '너처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좋겠다'고. 그 친구는 고등학교때 유학을 갔고, 명문대를 나왔고, 굴지의 은행에 다니며, 선생님과 결혼을 했다. '정말, 너는 이게 다 하고 싶은 게 아닌건데 한 거니?'라고 묻고 싶다. 어디에도 닿지 않는 말들 때문인지 그 친구가 임신 했다는 소식만 듣고 연락을 끊었다. 

p. 163 좋지 않은 일로 하여금 단단해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슬픈 일로 어른이 되기 싫었다.

p. 180 기록은 쉽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는 건 더 쉽기에 언제든 이미 지나쳐버린 마음으로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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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공감거리가 많았다. 빵집에 들어서면 내 인생 최대치의 집중력이 쏟아진다. 평소엔 부끄러워 봉투에 담아달란 말도 못 하는 내가 '트레이는 어디있나요?'라며 달려들 정도니. 빵을 고르는 순간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예전엔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맛있어보이는것을 골랐다면, 요즘엔 무언가 곁들이면 좋을 빵, 내일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으면 좋을 빵, 출근해서 나눠먹기 좋은 빵 등등 나름의 용도를 정해놓고 빵을 고른다. 열번 중 열번 다 계산할때 '아, 너무 많이 골랐나?' 싶지만 집에 오면 '더 사올걸'이라 생각한다. 앞으로의 날들이 빵 고르는 순간이었음 좋겠다. 








정신과 영수증

글 정신 그림 사이다


p. 34 떡볶이와 오뎅, 순대를 같이 먹듯이 세 권의 책을 사서 같이 읽으면 너무나 맛이 있다

p. 37 밭에서 캔 냉이인데 찌개에 넣어 먹으라고 주시고 같이 저녁을 먹으면 좋은데 갈 길이 멀다며 목장갑의 빨간 면들끼리 마주보게 짝지어 주고 길을 나서는 아빠 아빠를 보내고 시멘트 삽을 닦아 주인집에 가져다 드리고 와서 부엌 바닥을 다독이며 떨어지지 마라 떨어져 살면 안 좋아 아빠 대신 있으라고 찰싹 붙여주고 가셨으니 굳게 굳게 내일 아침까지 단단히 잘 굳어서 우리 같이 잘 살자

p. 78 애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셋째도 갖고 싶었는데 우리 둘을 잘 키우려고 상처를 내면서 포기했다고 한다 잘 키워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이 엄마의 희생으로 채워진다는 엄마가 버시는 것보다 조금 더 쉽게 버는 나의 돈 그 돈의 조금을 엄마에게 드린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는데 백화점 1층에 "나야 나 엄마의 핸드백이야"하며 빨강 체크무늬 핸드백이 손짓을 한다 어머 정말 우리엄마 거같이 생겼네 우리 식구같이 생겨 엄마가 포기했던 아기같이 생겨 그래서 그냥 두고 올 수 없었다 엄마는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하신다 그래서 주말에만 들고 다니신단다 3년 전에 사드린 검은색 핸드백이 많이 닳아 있었다 2001년 7월 12일 오후 5시 45분 핸드백 146400원 롯데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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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책을 읽었음에 감동했다. 너무 많은 인기로 2016년에 재출판 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나의 2001년은 어땠는지(그때 나는 14살) 작가 정신 처럼 스물 다섯의 나는 어땠는지, 내가 구매한 물건 영수증으로 글을 쓴다면 어떻게 쓸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엄마, 아빠에 대한 글에선 눈물이 났다.